화려함과 심플함의 묘한 조화…예술로 승화시킨 굴곡진 인생

꽃은 그 자태와 빛깔 및 향기 속에서 인간에게 환희와 안락감을 뿌려준다. 꽃들은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생명력을 지상의 생물들에게 왕성히 전달하지만 나무군에 비해 비교적 짧은 수명으로 생명의 유한함과 무상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6.25 전쟁으로 4살 짜리 딸과 급작스런 생이별로 한평생 이산가족의 그리움과 한을 간직하며 살아야 했던 정온녀. 그녀는 불꽃같은 열정의 화가로서 소임을 다하며 북한의 신사임당으로 칭송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선배 한상익 화가와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한 애절한 사연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그 스스로 말하는 꽃과 같은 해어화의 빼어난 매력과 그윽한 향취를 풍기면서 많은 섬세하고 수려한 꽃정물화를 화폭에 탄생시켰다. 그녀의 다채롭고 화사한 꽃정물화를 갤러리피코 정형렬 대표의 해설과 함께 음미해보자.

꽃정물화 : 만발한 꽃의 화려함 속…담백하고 진중한 우아함

'꽃정물화', 12호, 2005년
'꽃정물화', 12호, 2005년

우유 빛깔처럼 뽀얗고 백옥같이 보드라운 광택과 기품어린 윤기가 흐르는 백자 화병에 갖가지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다. 아름다움을 뽐내듯이 다투어 피어 있는 꽃들의 화려함에 비해 백자의 담백함, 고동색 식탁의 진중한 무게감, 그리고 배경색의 겹쳐 바른 모노톤의 고상한 우아함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화면상 잘려진 사각의 나무 받침과 역삼각형 굴곡미의 하얀 도자기는 직선과 곡선의 어울림을 상징하고, 한편으로는 소박한 자연미와 완숙한 인공미가 동시에 겹쳐지면서 구도상 상호 보완적으로 짜여진 조화미를 살려주고 있다.

정온녀는 꽃병을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동일한 구도의 꽃정물화를 즐겨 그렸는데, 그 중에서 이 꽃정물화가 가장 완성도가 높고 꽃과 배경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모든 이상적인 이미지들이 오버랩되는 그림으로 보여진다. 또한 저마다의 꽃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감이 난색조의 온화한 파스텔톤으로 휘감겨 있으면서도 이글거리며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어 색깔의 마법사라는 탄복을 자아낸다.

꽃정물화 : 이루지 못한 사랑 속…피어난 마지막 불꽃

'꽃정물화', 8호, 2009년 10월
'꽃정물화', 8호, 2009년 10월

말년에 거동이 불편하기 직전 작품이어서 그런지 유독 원색의 색채감이 강렬하다. 마치 장작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듯이 말이다. 아열대 꽃들이 정열적으로 백가쟁명하듯 화려함을 과시하면서 그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춤을 추며 뽐내고 있다. 그런 반면 꽃들을 떠받치고 있는 노란색 화병이 이처럼 풍성한 많은 꽃들을 담아내기에는 벅차도록 용량이 왜소하게 보이며 마치 흔들리고 있는 듯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이 그녀가 표현하고 싶었던 미적 공간으로는 협소했고 시야를 마음껏 넓히기에는 불안정했던 것을 암시해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화면의 중심부에 주인공으로 자리한 꽃은 다알리아다. 적색 다알리아의 꽃말은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이다. 이 꽃말 속에서 한평생 연모하였던 한상익 선배가 늘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후배로서 그녀를 지지않는 꽃처럼 변함없이 응원해 주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테이블 위에 떨어진 꽃은 카네이션으로 보인다. 이 분홍 카네이션의 꽃말은 ‘당신을 열애합니다’이다. 그런데 그런 열망과는 반대로 꽃이 전복된 채로 꽃 병 밖으로 버려져 있다. 잊지 못할 남한의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살지 못하여 가슴에 맺힌 그녀의 애틋한 원망의 심정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에게 곧 닥쳐올 죽음의 복선을 깔고 있는 것일까? 화병에 꽂혀 있는 그외 나머지 백일홍, 백합, 국화, 과꽃, 도라지꽃, 해바라기 꽃들은 이를 모른 채 화면을 수려하게 수놓고 있다.

국화정물 : 한(恨) 많았던 삶의 여정…남성적 결기의 비장미

'국화정물', 50x40cm, 1982년
'국화정물', 50x40cm, 1982년

정온녀의 꽃정물화는 대개 밝은 배경에 화사하고 다양한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어우러져 함박스러운 여성미의 아우라가 화면 속에 가득하다. 그 꽃들은 다알리아, 백합, 장미, 백일홍, 과꽃 등이 주류를 이루며 눈이 부실 정도로 다채로운 색채의 미감을 안겨주며 현란한 무희들의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 꽃 정물화는 왠지 비장미가 감도는 분위기가 농후하다. 어두운 황금빛 고동색 커튼의 질감이 구리쇠 빛깔처럼 단단하고 묵직하여 중후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화병 색깔도 은백색의 백자가 단골이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짙은 청보라빛의 청자가 등장하며 남성적인 결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화가 개인의 심경에 어떤 큰 변화가 생겨 이처럼 독보적이고 특이한 꽃정물화가 탄생한 배경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화는 가을의 상징과도 같은 꽃이다. 화병을 채운 국화는 노란색 한 종류로만 표현되어 있으며 심플하고 통일된 단일 색채로 인해 간결한 색채의 강렬함을 표현해주는 듯하다. 다만 풍부한 꽃의 활짝 만개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고개 숙이며 시들어져가는 과정을 통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상반된 이미지로 표현하며 대립의 긴장도를 높인 기법으로 보인다.

도라지꽃 : 각진 예민함과 휘어진 가녀림…처연하게 얽힌 인연의 자화상

'도라지꽃', 48x45cm, 1986년 8월
'도라지꽃', 48x45cm, 1986년 8월

정온녀  화가의 안목 렌즈에 잡힌 일명 ‘별꽃’ 도라지꽃은 그 특이한 오각형의 얼개가 그대로 되살아나 꽃잎의 각선미가 별빛의 창날처럼 예리하고 퍽이나 여리고 예민해 보인다. 그 꽃잎들의 휘어짐과 구부러짐, 그리고 젖혀짐과 쭉펴짐 등의 다양한 면면을 마치 사생하듯 한잎한잎 섬세하게 화폭에 옮겨놓았다.

정온녀의 도라지꽃은 꽃말 그대로 순백의 아름다움에 청순함을 더한 고귀한 자태로 표현된 것이고, 꽃잎을 들여다보면 여린 살결에 선명한 맥이 드러나 있다. 마치 힘겨운 인생에 끝까지 버티어 보자는 가녀린 여인의 팔뚝에 올라온 실핏줄이 연상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보라색과 백색 꽃잎의 맥에서 뭔가 처연한 느낌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한편 황토빛 담벼락에 담쟁이 넝쿨처럼 백색과 보라색 도라지 꽃잎들이 서로 얽히고 감겨 있는 모습은 진한 사랑의 표현과 속삭임을 주고받는 자연미의 은유적 표현처럼 느껴진다.

김태훈 기자 thk@koreareport.co.kr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코리아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