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 거슬러

단군 조선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은 분단 이전 같은 역사를 공유했다. 분단으로 체제가 갈리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졌지만, 불변하는 ‘민족’에 기반한 역사인식은 별반 차이가 없다.

북한에서는 '주제화'라는 양식을 통해 사회성 높은 그림을 꾸준히 양산하고 있다. 그러한 시대물은 큰 범주에서 역사화라는 양식을 시의성 있게 맞춰서 사회주의적으로 변형, 특정 주제를 집약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북한의 역사화에는 가슴 아프고 뼈저린 역사적 실화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담고 냉엄하게 성찰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다.

해방 직후와 일제 강점기 시대를 다룬 역사화와 아울러, 북한에서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비해 비교적 자긍심이 덜하다고 알려진 조선시대의 역사적 위인들의 모습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차례대로 꽃망울을 터뜨리듯 조명한 역사화를 갤러리피코 정형렬 대표의 해설과 함께 감상해보자.-

문운길 화가 '광복의 그날' : 해방의 기쁨, 새 역사 창조의 희망

문운길 '광복의 그날' , 158.5x103.5cm, 연대미상
문운길 '광복의 그날' , 158.5x103.5cm, 연대미상

이  그림은 만화처럼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병정놀이를 통해 일본군의 패배와 몰락을 상징성 있게 표현하였고 해방의 기쁨을 압축적이고 코믹하게 드러낸 재미있는 주제화다. 만세의 함성과 환호가 잦아들고 이내 일본군 파출소를 동네 아이들이 접수하러 쳐들어갔다 나오는 장면이다.

이미 일본 순사들은 도망간 뒤였고 그들의 의복과 군화 및 무기들 일부를 놀잇감으로 삼기에 이른다. 일본도를 둘러멘 대장 아이, 그걸 신기하고 자랑스러운 듯 쳐다보는 동생 꼬마, 따라다니는 강아지에게 일본순사의 모자를 물고 다니게 하여 해학미의 극대화를 꾀한다.

한껏 기세등등 신이난 아이들도 이처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그러는 아이들을 쳐다보던 어른들도 덩달아 즐거워하며 아이들의 행태가 재미있는지 희열에 넘쳐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다. 좌우면의 어른들과 중앙의 아이들이 대각선의 구도로 배열되면서 화면에 활력적인 율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일제의 감옥과 파출소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뿌연 연기와 찢겨진 서류 더미들은 해방된 그날의 흥분을 잘 웅변해주고 있다. 통쾌스러운 일제 잔해의 파편들과 웃음꽃 피는 민초들의 훈훈한 화목의 온기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새국가 건설과 새역사 창조의 희망을 내비치고 있다.

해방의 환희에 들떠 있는 어른들에게 마음껏 웃음을 선사하는 아이들의 동심을 소재로 당시의 정황을 이처럼 상상력 넘치게 기발하고 오지게 표현한 작품은 남북한 회화사를 통하여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역사화적인 현장감이 생동하는 스케치를 통하여 당시 인물 군상들의 표정과 몸동작들도 매우 적극적으로 성격 표현하여 그림 감상자들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정현웅 화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 희망의 씨앗, 교육 통한 독립의식 고취

정현웅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31x22cm, 연대미상
정현웅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31x22cm, 연대미상

정현웅은 역사화를 즐겨 그린 대가이고 남북한 어디에 있을 때도 명성을 드날린 화가이다. 그림 가치의 우선순위를 메길 때 통상적으로 역사화(종교화, 신화화, 풍속화, 주제화 등 포함), 인물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순으로 흔히들 평가한다. 물론 이 분야들이 중복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역사화는 책 몇권 분량이 한 화면에 농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의 고증, 인물들의 내면 세계, 역사적 평가가 충분히 파악되어야 가능한 그림이 역사화이다. 정현웅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는 비록 작은 화면이긴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우국지사의 애국 시민들을 위한 독립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 장면이 담겨 있는 귀중한 항일운동 역사시리즈물의 한 작품이다.

비밀 교육 장소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시선을 애국계몽운동가에게 집중하고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그는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불어넣으며 그 실천 방법론에 대해 열띤 강의를 실시하고 있다. 나라 잃은 백의민족의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진지한 자세로 독립운동가의 말씀에 몰입되어 있는 모습에서 희망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짙게 풍겨온다.

전체적으로 파스텔톤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훈훈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물씬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오다 출입문가에 서서 강의를 듣는 소녀가 이 분의 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영특해 보인다. 열변을 토하고 있는 강연자는 한손엔 책을 들고 다른 손가락은 힘주어 액션을 보이며 혼신을 다하고 서 있어서 좌우 양쪽에서 비균형적 대칭을 이루고 있다.

동아일보 삽화가 재직시절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었던 작가의 이력에 비추어 볼 때 강연자의 정의로움에 불타는 모습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

고수진 화가 '찬란한 민족문화의 력사를 더듬어' : 조선 시대를 하나의 파노라마로

고수진 '찬란한 민족문화의 력사를 더듬어', 274x106cm, 2016년
고수진 '찬란한 민족문화의 력사를 더듬어', 274x106cm, 2016년

“아! 고수진 화가님, 참으로 대단하고 훌륭하십니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역사적 위인들과 시대적 중심의제들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도록 파노라마화(전경화)로 꾸며진 조선시대 일대기 역사화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을 망라한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에 비견되는 대작이자 명작이다.

다인물 군상을 거침없이 그려나간 작가의 뛰어난 실력에도 찬사를 보낼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한 세밀하고 섬세한 시대적 배경과 심층적 장치들에 대한 식견도 놀랍다. 한편 이런 그림을 구상했다는 발상 자체가 진심어리게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역사를 움직였던 위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흠뻑 묻어나 있다. 이조시대를 봉건시대라고 폄하만 하는 북한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여 보게 된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열정적인 애민정신과 노인과 어린이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열중해서 바라보는 장면이 우선 중앙에서 강렬하게 시선을 흡인한다. 그 옆에 ‘지식광명, 무식암흑’이라고 적힌 펄럭이는 깃발도 시사적이다. 이조백자 도자기를 어루만지며 살피고 있는 도공들의 장인정신, 신기전과 화포들을 점검하는 장군들과 병사들의 환한 표정들을 보면서 혜안 깊은 선혈들의 노고가 가슴뭉클하게 다가온다,

기중기를 어루만지는 다산 정약용의 땀방울, 음악의 거성 박연의 고아한 품격, 방랑시인 김삿갓의 청렴한 자태, 대동여지도를 바라보며 여정 채비를 차리는 김정호, 한약 조제에 몰입하는 허준의 모습도 감명적이다. 전투태세로 돌진하는 판옥선과 거북선, 숭례문, 첨성대, 측우기 등도 장엄하게 그려지고 있다.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 자랑찬 역사들을 한편의 그림으로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정교하게 집약한 대하드라마 그림이다.

김태훈 기자 thk@korea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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