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김정일이 만든 통일 원칙 폐기한 北
'특수관계' 기반 합의·경협 '백지화'…대화 방식도 변화 가능성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통일을 포기하는 등 대남전략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선대의 유산을 완전히 지워 나가고 있다. 북한의 지도자가 50년 넘게 유지해 온 선대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남북관계의 앞날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김 총비서는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헌법에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 표현을 삭제할 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며, '동족관계의 북남조선', '우리민족끼리', '평화통일' 등 상징으로 비쳐줄 수 있는 '과거시대의 잔여물'을 처리해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철거하는 등 민족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란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총비서가 헌법에서 삭제를 지시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은 할아버지 김일석 주석 집권 시기 이뤄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담긴 '조국통일 3대 원칙'이다.

조국통일3대헌장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1993년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 3가지를 종합한 개념이다. 기념탑은 이같은 통일 원칙을 만들어 낸 김일성 주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김 총비서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1년 세운 것으로 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은 선대의 유훈과 업적을 영구적으로 기리는 북한의 문화에서는 파격적인 조치일 수밖에 없다.

김 총비서는 이번 회의에서 또 '남북경협의 상징'이라고 스스로 언급한 경의선 철로의 철거와 금강산 관광을 담당하던 북측 기구인 금강산국제관광국의 폐지도 지시했다. 경의선과 금강산 관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당시 남북 경협의 유산이다.

북한이 그동안 '위대한 수령'의 '유훈'(遺訓)을 절대적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던 점을 고려하면 김 총비서가 유훈 통치를 거스를 만큼 대남전략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의 이번 조치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를 가장 크게 변화시킬 계기가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동시에 김 총비서가 선대와 차별되는 '자신만의 역사'를 쓰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총비서는 이같은 내용이 담길 헌법 개정은 다음 최고인민회의 때 심의하기로 했다.

최근 북한이 상, 하반기에 한 번씩 최고인민회의를 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 총비서 역시 선대의 유훈을 지우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정립하는 데 내부적으로도 필요한 명분을 쌓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전쟁 중인 두 국가관계'로 공식화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한 민족'이라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전제로 펼쳤던 남북 간 합의와 사업들은 모두 '백지화'될 위기에 놓였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민족화해, 무력충돌 방지, 평화 보장,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의 공동노력을 규정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등 과거의 모든 남북 간 합의서를 공식적으로 무효화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특수관계를 전제로 추진한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사업은 이미 소멸 위기에 처했다. 북한은 이번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금강산국제관광국의 폐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부터 이미 금강산 관광지구의 상당수 시설을 철거하는 등 금강산을 남북의 협력 공간이 아닌 북한만의 관광지구로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굳혀 왔다.

개성공단 역시 이미 남측 공장 30여 곳이 북한 당국에 의해 무단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고, 작년 말부터는 지난 2020년 폭파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의 잔해도 완전히 철거하면서 역시 재개발 동향이 구체화되고 있다.

남북 간 대화 방식도 기존 관례가 모두 통하지 않는 백지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내각의 대남기구 중 하나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폐지했고, 곧 개최를 예고한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당의 대남기구인 통일전선부의 폐지 혹은 개편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민간단체 성격으로 운영했던 대남 분야의 '외곽기구'들도 상당수 폐지됐다. 

향후 한반도 문제에 관해선 외무성이 전면으로 나설 것이 유력하다. 북한은 지난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신청 거부 사실을 처음으로 대남기구가 아닌 외교를 담당하는 외무성을 통해 밝혔고, 최근 대남기구 정리 및 개편을 위한 협의회를 최선희 외무상이 주도하면서 남북관계를 '외교'의 틀에 넣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북한이 이같은 대남정책 기조를 장기화할 경우 정부의 대북정책도 전면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이미 지난해 통일부는 남북 교류협력 담당 4개 부서를 한 곳에 모았고, 개성공단지원재단을 해산하기로 하는 등 남북관계 담당 부서를 축소한 바 있다. 앞으로는 단순히 교류협력 담당 조직의 개편뿐만 아니라 남북 교류협력이나 통일을 전제로 세운 정책의 전면 수정이 필요한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민대호 기자 mdh50@korea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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