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랑 ‘2024 예감전-자연 회귀적 열망’, 4월 20일까지
앞날 주목되는 모혜준·우병윤·이상덕·이채영 작품세계 소개
느림의 가치 통해 자아 회복과 영혼의 해방에 다가가

‘오늘’을 지배하는 시공간은 ‘현대’이다. 현시대를 규정, 또는 특정하는 용어, 분석은 다양하지만 ‘속도’로 함의되는 현상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사회와 자연의 변화는 현대성을 특징짓는 징표들이다.

온전한 시간을 해체하는 속도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도 흔들며 폭력적 현대성을 가속화시킨다.

이러한 시대를 매일 마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속도의 절제, 본질적 사유를 통해 내면의 여유와 자아 회복의 시간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전시가 한창이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지난달 13일부터 내달 20일까지 열리는 ‘2024 예감전’이다.

선화랑이 해마다 개최하는 ‘예감전’은 앞으로 작품 활동의 귀추가 주목되는 작가들을 선정하고, 그 역량과 비전을 보여주는 자리이다. 올해는 모혜준, 우병윤, 이상덕, 이채영 4명의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전시 주제는 ‘자연 회귀적 열망 : The Longing to Return to Nature’으로 가속화의 절제, 느림의 미학을 다시 한 번 일깨우기 위해서다. 조금 더 자기 충만의 시간과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며 정신적인 안위와 안정에 가치를 둔 것이다.

모혜준 작가와 작품. 한지에 펜, 2024
모혜준 작가와 작품. 한지에 펜, 2024

모혜준 작가는 한지에 펜으로 깨알 크기만 한 타원형을 반복적으로 그려 커다란 형체를 만든다. 균일하고 일정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선들의 집합체이며 펜의 뭉침과 성김, 색의 휘발로 인해 예기치 못한 이미지 또는 우연적인 효과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계획을 하더라도 예측 불가한 결과물이 나타나는 삶의 다양성을 관객과 공감하려는 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한지에 먹 대신 검은 펜을 사용한다. 검정색은 모든 색을 머금은 색이자 가장 절제된 색이기도 하다. 작가는 펜의 두께와 반복 작업을 통해 일상의 다양성을 농담과 여백으로 표현한다. 무수한 선을 통해 완성된 ‘결’은 삶의 반복과 예기치 못한 사건을 담은 것으로,  시간을 사유하는 과정이자 노력의 결실과 성장의 흔적이다.

작가는 단순반복작업으로 자신을 정화해나간다. 고통과 안식, 그리고 성장의 과정을 거치는 그만의 방법이다. 반복은 위안과 심적 안정을 선사한다. 고요한 치유 과정이자 시간을 사유하는 행위이다.

전시작은 솔직하고 가식 없는 반복이 일상과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체감케 한다. 이를 통해 매일의 순간들은 고통과 기쁨 사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작은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병윤 '중첩(重疊)', 100.0x80.3cm Plaster & gouache on wood panel, 2023(왼쪽), '중첩', 65.2x53.0cm Plaster & gouache on wood panel, 2024(오른쪽)
우병윤 '중첩(重疊)', 100.0x80.3cm Plaster & gouache on wood panel, 2023(왼쪽), '중첩', 65.2x53.0cm Plaster & gouache on wood panel, 2024(오른쪽)

우병윤 작가는 석고 작업을 통해 자연을 닮은 ‘조화’와 ‘균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작업 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는 우주 만물을 상호 연관된 '관계의 망'으로 파악해 이 본래의 불이(不二)적 관계를 나누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점, 선, 면, 색 등 기본적 조형요소를 통해 불규칙적인 패턴을 만들어낸다. 석고로 질감을 구현하고 색을 입혀 말린 뒤 긁어내 하단의 석고가 드러나는 과정을 반복해 무질서하면서도 조화로운 화면을 완성한다. 

그의 작업은 끊없는 반복, 중첩의 산물이다. '중첩'은 작품의 직접적인 표면을 거침으로써 사유의 심연에 도달한다.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는 '표면'이란 매체의 물성과 그의 내면세계가 겹쳐지는 중첩의 구역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통찰을 포착한다.  석고로 결을 만들어 낸 밑바탕 위에 일차 그림을 완성하고, 다시 그 표면을 수없이 긁어내는 노동 끝에 물감 아래에서 석고의 물성이 발현돼 마침내 하나의 덩어리 빛난다. 석고와 물감이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닌 개별 존재인 동시에, 상이한 둘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의 총체와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한 화면 안에서 충돌이 점점 융화되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자연의 순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장 과정과도 유사하다.

이상덕 작가와 작품. 장지에 먹, 혼합채색, 콜라주
이상덕 작가와 작품. 장지에 먹, 혼합채색, 콜라주

이상덕 작가는 화면을 통해 우리의 눈에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제안한다. 화면 안에 착시를 의도적으로 설계해 우리에게 다른 시각으로 세상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뗄 수 없는 스마트폰과 모니터의 가상세계는 실제 주변 환경과 자연을 직접 대면했을 때의 시각적 경험과 정서적 감동을 오히려 가두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의 닫힌 시공간 장막을 한 겹씩 걷어내 전방위를 넘나들 수 있도록 작가의 화면이 창구가 되어주고자 한다. 

가령 전시작 ‘오후’는 어둠과 밝음, 불안과 행복이 공존하는 시간으로 가상의 시공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도록 한다. 

작가는 콜라주를 활용해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그림자를 추가해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호한 흥미를 선사한다. 이는 대상을 바라보고 인지하고 느끼는 우리의 시각에 좀 더 다양성과 여유로움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콜라주를 활용한 것은 동양의 여백 개념을 현대적, 한국적 정체성으로 작가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콜라주를 ‘평면조각’이라 한 것은 여백과도 같은 보이지 않는 공간의 의미를 전하는 셈이다. 

이채영 '섬',  130x162cm, 한지에 먹, 2016
이채영 '섬', 130x162cm, 한지에 먹, 2016

이채영 작가는 소외된 풍경, 낯설지만 익숙한 과거의 흔적을 통해 현재의 자신과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메마른 겨울의 도회지, 번잡하고 복잡한 도시 속에서 사라지고 폐허가 된 공장과 창고, 인적이 사라진 무성한 풀숲 등 황량하고 적막한 풍경은 누군가의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풍경을 또 다른 정서를 전달한다. 자신만의 구도를 통해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보여준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켜 있는 모습 속에 오직 ‘풍경‘과 ‘나’만이 자리한다.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소외된 풍경들 속에서 비정하거나 슬프거나 아주 고독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려 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장소가 우리의 세계라는 것을, 무척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풍경들이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 풍경임을 일깨운다.

생명을 다한 부재는 그 뒤 새로운 것의 탄생의 순간을 은유한다. 과거의 시간이 있기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처럼 작가의 화면 속에 남겨진 장소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4명 작가의 작업은 화면 위로 시간을 머금은 흔적과 반복, 순환의 과정이 축적돼 있고, 이는 자연의 순리와도 직결돼 보인다.

인간이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은 완성된 예술작품을 닮았다. 하나의 개체는 수많은 시간과 물리적 자발적인 여러 과정, 노력의 결실이 쌓인 무르익은 완성체다. 작가 저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과 행위 흔적은 우리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만든다.

속도는 기계의 시간이며, 느림은 자연의 시간이라는 말은 4인 작가의 화면과 잘 어울린다. 느림은 빠른 속도에 박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능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더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작품들의 화면은 일상의 시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전이시키고 시간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현실 너머의 세계를 사유토록 한다.

박종진 기자 krjjp@korea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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