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漆'전, 송원아트센터 전시…이달 17일까지
'나성숙옻칠학교' 20명 작품, 전통과 현대 융합

'나성숙옻칠학교' 나성숙 작가와 제자들이 공동작품전인 '봄, 漆'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 송원아트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성숙옻칠학교' 나성숙 작가와 제자들이 공동작품전인 '봄, 漆'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 송원아트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겨울 끝자락의 여운이 아직 서성이는 가운데 봄의 전령을 성큼 불러내 온기를 전하는 특별한 전시가 눈길을 끈다. 

‘옻칠’을 다양한 예술로 변주한 북촌 한옥마을 ‘서로재’ 학생 20명이 참여한 ‘봄, 漆(칠)’ 전시다.

지난달 29일 종로 북촌의 송원아트센터에서 막을 연 전시는 옻칠을 매개로 전통과 현대를 융합한 창작품과 함께 서로재를 인연으로 한 사제(師弟)의 아름다운 예술 하모니를  보여준다.

북촌 계동길에 자리한 서로재는 일반인이 옻칠을 통해 예술을 배우고 창작하는 옻칠학교이다. 서로재의 주인이자 스승인 나성숙 작가는 서울대 미대(응용미술학과)를 나와 디자인학과 교수로 지내다 돌연 그만의 옻칠 예술과 배움의 공간을 열었다. 갑작스런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심연의 고통과 절망 끝에 ‘전통’에서 희망의 창을 찾고, 옻칠 예술에 모든 걸 쏟았다. 

나 작가는 옻 예술의 전통과 기초부터 익히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옻칠을 공부했다. 교수 신분으로 국내에선 옻칠 유형문화재인 손대현 선생께 사사했고, 일본 이와야마옻칠미술관의 전용복 선생, 그리고 중국 소주까지 가서 사진(謝震) 선생에게 옻칠을 배웠다.

나성숙 작가는 우리 전통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를 봤다. 그리고 북촌에 한옥을 직접 구입해 2006년 봉산재라는 아트센터의 문을 열고 학생들에게 옻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 작가의 옻칠학교는 소문이 났고, 대기업의 회장 부인부터 의사들, 일반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찾았다. 봉산재에서 14기의 옻칠학교를 운영한 나 작가는 이후 서로재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나성숙 작가와 7폭 대작 '한양진경'. 조선시대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 정선이 한양 곳곳을 그린 것을 모피프로 했다. 2012년 작으로 옻칠, 나전 등으로 6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나성숙 작가와 7폭 대작 '한양진경'. 조선시대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 정선이 한양 곳곳을 그린 것을 모피프로 했다. 2012년 작으로 옻칠, 나전 등으로 6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옻칠학교는 벌써 25기까지 운영돼 200여명의 제자가 배출돼 여러 차례의 단체전을 함께했고, 정재원(7기)‧박경화(17기)‧신경미(19기) 제자는 개인전을 열 정도로 전문작가로 성장했다.  

‘나성숙옻칠학교’의 옻칠 수업은 ‘전통’을 넘어 ‘창조’에 역점을 둔다. 모든 분야가 융합하고 해체되고 변화해 예술의 장르‧경계가 무너진 상황에 전통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창조를 통해 승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를 현대에 재현해도 현대 도자기일 뿐 고려‧조선시대의 전통 도자가 될 수 없는 이치이다.

나성숙 작가가 우리 옻칠뿐 아니라 일본, 중국 옻칠까지 공부한 것은 전통을 섭렵해야 현대와 접목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이는 나 작가의 작품 세계와 옻칠학교 제자들의 작품이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성을 변주한 점에 뚜렷이 나타난다.

동양에는 예로부터 교탈천공(巧奪天工) 천문만화(天紋萬華)라는 말이 있다. 그 교묘한 아름다움이 마치 하늘의 공을 빼앗은 듯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옻칠의 표현기법을 상찬하는 말이다.

'봄, 漆' 전 작품들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봄, 漆' 전 작품들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옻칠은 동양권에서는 이미 4천여년 전부터 단순한 생활용품에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금속, 목기 등 다양한 종류의 칠기류에 널리 사용돼 왔다. 하지만 전통의 틀에 갇힌 옻칠은 선대의 무한 표현기법의 상찬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전통’은 시대정신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소통과 관계성 사이에서 숨 쉬며 존재성을 알린다. 박제된 재현에 전통은 무너지고 예술의 본질인 ‘창조’의 에너지가 사라지면 전통도 사그러진다.

서로재 화우들의 옷칠 작품들은 수업 연한과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개성은 뚜렷하고 열정의 흔적이 깊이 배어있다.

'봄, 漆'전 전시작.
'봄, 漆'전 전시작.

나성숙 작가는 ‘봄, 칠’ 전시에 3가지 의미가 있다며 ‘전통’을 그 하나로 꼽았다. 전통의 계승과 현대성과의 융합을 강조한 것으로 이번에 전시된 서로재 20명의 출품작들은 소반, 옻칠화, 도태칠기, 쟁반, 금박 등 인내와 끈기가 요구되는 전통기법으로 제작하고 면구성과 색채감을 현대감각으로 재해석하였다.

강정웅 ‘눈꽃풍협반’(순금박,나전), 민수인 사과합(도태칠기), 배성미 ‘축복’‧정부용 ‘자작나무숲’(옻칠화), 김미옥 ‘내마음의 북극성’‧김옥영 ‘수복강녕’‧김찬희 ‘봄오리’‧김하나 ‘곧은 소나무, 그리고 고고한 학’‧송난영 ‘만복운흥’‧염미령 ‘나주소반’‧이광희 ‘봄의향기’‧이동희 ‘당초 소반’‧이미연 ‘파란나라’‧한승원 ‘붉은 꽃잎’(소반), 이호선 ‘사군자 서안’(원목서안), 정영순 ‘늘푸른’(소나무쟁반), 조혜진 ‘오렌지 향기’(무늬목 쟁반), 노은정 ‘메트’(물푸레무늬목), 박은하 ’행복한 코끼리‘(목조각상) 등 수십 점에 이른다.    

제자들의 작품에 대해 나성숙 스승은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메아리는 시적인 뜻과 작가가 부여하려는 감동의 뉘앙스로 칠해지고 있고, 이 작업은 될수록 많은 함축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표현하려는 동작으로 나타난다”며 “서로재 작가는 단순한 옻칠쟁이가 아니라 재창조의 작가”라고 평한다.

강정욱 작품. '옻칠 용피 나전장'(2022 대한민국한석봉예술대전 최우수상 수상작), '귀면와'(기와, 주합칠,순금박), '황룡사지 사신도 동경 재현'(동, 흑칠,순금박)(왼쪽), '눈꽃풍 협반' (2023 한국문화재기능연합회 작품전 장려상 수상작)
강정욱 작품. '옻칠 용피 나전장'(2022 대한민국한석봉예술대전 최우수상 수상작), '귀면와'(기와, 주합칠,순금박), '황룡사지 사신도 동경 재현'(동, 흑칠,순금박)(왼쪽), '눈꽃풍 협반' (2023 한국문화재기능연합회 작품전 장려상 수상작)
민수인 작품. '도자기'(사과합, 사과화병, 도태칠기)(왼쪽), 염미령 작품 '쟁반'(생칠, 색옻칠, 목심저피, 금박 등)
민수인 작품. '도자기'(사과합, 사과화병, 도태칠기)(왼쪽), 염미령 작품 '쟁반'(생칠, 색옻칠, 목심저피, 금박 등)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시작의 주인공들이 정통 미술과는 무관한 ’일반인‘이란 점이다. 강정웅 작가는 대기업에 다니면서 ‘목공’을 취미로 하다 옻칠에 입문했다. 2021년 나 작가의 소개로 옻칠 장인에게서 기본을 배운 뒤 옻칠학교에 들어가 옻 예술 각 분야를 익히는데 전력했다. 현재는 옻칠화뿐 아니라 금박, 나전, 용피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발휘해 각종 전통예술대전에서 수상을 하는가 하면 국가유산수리기능인 자격자이기도 하다.

강 작가는 옻칠은 공정이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요구하지만 미감이 뛰어나고 질 수준이 높아 작품이 완성되면 뿌듯함을 느낀다고 한다. 

강 작가는 “전통 중 옻칠은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려있다”며 “선생님 가르침처럼 전통을 창조적으로 되살려 저변을 확대해 대중화하는 게 중요하고, 해외 전시를 통해 재해석된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싶다”고 했다.

민수인 작가는 도자에 관심을 보여오다 옻칠을 배우며 그만의 ‘도태칠기’를 창작한다. 도자기의 표면을 옻칠로 마무리해 작업하는 도태칠기는 순수 도자와는 전혀 다른 질감과 매력을 지닌다.

민 작가는 옻칠학교에서 기초부터 배우며 옻칠의 물성에서 도자의 유약과는 다른 우수한 질감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 새로운 도자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민 작가는 “옻칠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옛것으로 전통과 현재를 잘 이어갈 수 있는 재료”라면서 “전통 도자에 현대의 미학을 접목하는데 경주하고 있다”고 했다.

'봄, 漆'전 전시작품들. 배성미 '축복'(옻칠화)(위), 정영순 '늘푸른'(소나무쟁반)(아래) 등.
'봄, 漆'전 전시작품들. 배성미 '축복'(옻칠화)(위), 정영순 '늘푸른'(소나무쟁반)(아래) 등.

송난영 작가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유학 후 언론사 사진부 등에서 일하다 뒤늦게 옻칠을 만났다. 북촌에 살면서 우연히 서로재에서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노 작가를 보게 됐고, 아름다운 소반과 다양한 작품에 이끌려 옻칠학교에 들어갔다. 옻이 올라 1년 넘게 두 차례나 치료를 받고 세 번 도전 끝에 옻칠과 친숙해졌다. 

수 없는 사포와 온갖 정성 끝에 완성된 작품에서 느끼는 희열과 감격, 분신과도 같은 결과물에 대한 애정, 현대 재료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옻칠의 깊은 색과 맛, 송 작가가 옻칠학교를 3년 넘게 다니는 이유다.

나 작가는 ‘봄, 칠’ 전시의 또 하나의 의미로 ‘정(情)’을 얘기한다. ‘나성숙옻칠학교’가 26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 이번 전시가 가능한 것도 학생들이 이 서로 돕고 채워주고 아껴주면서 교류해온 정 때문이란다.

특히 작년 말 나 작가가 뇌출혈로 쓰러져 옻칠학교에 위기가 닥쳤을 때 강정웅‧민수인 작가를 중심으로 수업을 이어가고 전시까지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작가와 학생들 사이의 존경과 정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작가는 이번 전시를 송원아트센터에서 개최한데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송원아트센터는 동국제강그룹 산하 송원문화재단이 장학사업과 문화예술활동을 꾸준히 확대해나가는 과정에 설립돼 2006년 6월 첫 전시를 열었다. 이후 젊은 작가들의 작품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미술뿐 아니라 공예 발전과 함께 건축 분야에도 폭넓은 지원을 하고 신진작가 발굴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송원아트센터 남희정 관장
송원아트센터 남희정 관장

송원아트센터 남희정 관장은 나성숙옻칠학교 학생이기도 하다. 남 관장은 5일 전시 오픈 행사에서 옻칠학교에서 4년여 공부를 한 것을 밝히면서 “(옻칠학교가)우리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주길 바란다”면서 “전통과 현대의 융합예술인 이번 전시를 많은 사람들이 향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서로재 화우들의 전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성장하길 바라는 나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앞서 봉산재‧서로재 학생들과 수차례 공동전을 연 것이나 2023 청주비엔날레에 공방학생들과 ‘우리 서로 다리가 되어’ 라는 주제로 작품을 출품해 소장품으로 선정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봄날 가득한 사제의 아름다운 예술 동행전은 이달 17일까지 이어진다.

박종진 기자 krjjp@korea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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