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비핵화' 논란 일으킨 인사들 부적합…北, 거부할 수도
북한과의 '약속' 지키지 못한 인물 빠져야…'큰 당근'이면 예외?

2018년 3월 6일 오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수석특사로 한 대북특사단이 1박2일의 대북 일정을 마친 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도착했다. 왼쪽부터 김상균 국정원 2차장, 서훈 국정원장,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천해성 통일부 차관,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청와대
2018년 3월 6일 오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수석특사로 한 대북특사단이 1박2일의 대북 일정을 마친 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도착했다. 왼쪽부터 김상균 국정원 2차장, 서훈 국정원장,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천해성 통일부 차관,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청와대

오는 21일 워싱톤에서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특사(밀사)'가 북한 측과 접촉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누가 나설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코리아리포트'는 지난 5일 국내외 정보관계자 등을 통해 대북특사가 북한과 만나다는 단독 보도를 한 바 있다. 이에따라 대북특사 적임자로 몇몇 인사들이 거론되는데 구체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다만 김대중 정부 때 첫 남북정상회담 과정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를 검토할 때 북한이 수용하기 어렵거나 불만을 가질만한 인사들은 꼽을 수 있다.

◇ 역대 정부 '대북특사(밀사)' 누가 나섰나

사전적 의미로 특사(特使)는 남북 간 대화와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특정 임무를 가지고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으로, 대통령으로부터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아 다른 나라에 파견된 사절을 일컫는다.

남북 간 특사 교환의 시작은 지난 1972년 5월 2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 고(故)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면담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당시 이후락 부장은 공개된 특사(special envoy)라기보다는 밀사(emissary)에 가까웠다. 이어 북한의 박성철 당시 부수상이 같은 달 29일 이후락 부장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서울을 방문, 막후 접촉 등을 거쳐 '7ㆍ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85년 10월 제5공화국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담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밀사 역할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이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류 및 경제회담의 물꼬를 트는 단초가 됐다.

노태우 정부 때에도 당시 박철언 정무장관과 서동권 안기부장이 '북방밀사'로 대북 관계에 핵심 역할을 맡았다. 밀사가 아닌 특사의 교환이 논의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북한 핵 위기 때였으나 특사 교환은 무산됐다.

김대중 대통령(1998~2003년 재임)은 1998년 2월 취임식사에 이어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에서도 남북 당국 간 특사 교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후 2000년 3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ㆍ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중국 상하이에서 비밀 접촉, 같은 해 6월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해 5월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특사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북한 고위인사들을 만나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한 것으로 전해졌다. 임동원 외교 안보 통일특보는 2002년 4월 3일부터 나흘간 평양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 당시 정체돼 있던 남북관계를 타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2003년 1월 북한을 방문, 세 번째로 특사 역할을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2003~2008년 재임) 때에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이 대북특사 역할을 했다. 2005년 6월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북핵문제를 협의했고, 12월 김만복 국정원장은 대통령으로부터 공식 임명장을 받은 최초의 대북특사로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공식적 활동을 했다.

또한 성 김(Sung Kim)이 2008년 6자회담 수석대표 겸 대북특사로서 북핵 6자회담에 대부분 참석했으며, 북한을 10번 이상 방문했을 정도로 북한문제 전문가로서 활동을 했다.

◇ 대북특사(밀사) 오리무중…北이 원치 않는 인물은?

남북관계의 불확실성과 예민한 관계를 고려할 때 대북특사(밀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와 못지않게 누가 특사(밀사)로 가느냐도 북한의 독수성에 비춰 신중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북한이 바라는 인사를 특사로 보내고, 그 반대의 경우는 피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설명이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가장 불만을 갖고, 분개까지 하는 특사는 북한의 비핵화를 미국에 잘못 전달해 북한이 보유핵을 통해 남한을 비롯해 전 세계를 상대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게 한 장본인들이다.

'북한 비핵화'가 수면 위로 등장한 것은 2018년 3월 5일 대북특별사절단대표단으로 방북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6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하면서다.

당시 정의용 실장은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고 전했다.

정 실장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하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김 총비서가)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이며,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 점”이라고 말했다.

정의용 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은 8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방북 성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했다. 이를 철썩같이 믿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김정은 총비서와의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그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세기적인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정의용 실장이 전한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을 통해 확인한 결과 북한은 비핵화(핵폐기) 의지를 밝힌 적이 없었다. 북한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확고한 입장이고 이는 김정은 총비서도 바꿀 수 없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김 총비서가 밝힌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이란 뜻도 특사단이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소식통은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김일성 때부터 김정일ㆍ김정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비핵화 목표’를 강조했지만 이는 ‘북한이 비핵화할 경우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도 핵을 폐기하라’는 뜻으로 사실상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미국은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북한의 핵에 대한 입장을 확인했지만,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발표한 뒤였다.

결국 6ㆍ12 싱가포르 첫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와 관련해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북한 역시 비핵화 문제가 전 세계의 이목을 받으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됐다.

'북한 비핵화' 용어는 2018년 당시 대북특사단(정의용 실장, 서훈 국정원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방북 후 나왔지만 문재인 정부 초기 남북관계를 임종석 당시 비서실장이 총괄했다는 점에서 그의 책임론이 제기된 바 있다.

소식통의 전언을 종합하면 현재 북한과 접촉할 수 있는 대북특사로 임 전 실장을 비롯해 대북특사단 멤버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특사 경력이 있어 대북특사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박지원 국정원장에 대해 소식통은 "지난 2000년 6월 정상회담 과정에 김대중 정부가 '약속'한 게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못해 북은 10년 이상의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고난의 행군' 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박지원 원장은 당시 남북관계에서 특사 역할을 했기게 북으로서는 큰 불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과거의 일이고 현재 남북관계나 북미관계가 달라진 상황에서 전술한 인물들이 대북특사로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입장을 바꾸지 않는한 전례에 비춰보면 수용하기가 쉽지않다. 북한이 아주 큰 '당근'을 얻을 수 있다면 예외일 수는 있다. 

백민일 기자 bmi21@koreareport.co.kr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코리아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