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만에 반복된 '출판 사태'…시대 흐름따라 변화
초기 이적물로 출판금지, 대표 구속…"문제 없다" 확산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 일제히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통일부의 승인 여부와 국가보안법 저촉 등 법적 문제를 비롯해 진영 간 이념대립까지 나타나는 상황이다.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은 지난달 1일 김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원전을 그대로 옮긴 8권 분량의 책을 발간했다. 출판사는 서평에서 좌익 세력의 항일 무장투쟁도 항일 투쟁의 혁혁한 공적으로 인정하는 날이 오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민족사랑방 김승균 대표는 "책의 출판이 민족의 고귀함을 일깨우고 남북 화해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출간의 의미를 전했다.
◇ 김일성 유소년기부터 항일투쟁 과정…北 '성경', 김씨 3대 신격화 논란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 4월15일 김 주석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발표한 회고록이다. 김 주석 본인이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 그리고 항일운동 까지의 자신의 인생사를 구술한 책으로 "나의 생애는 조선의 근대역사에서 민족수난의 비극이 가장 암담하게 중첩되던 1910년대로부터 시작되었다"라며 시작된다.
<세기와 더불어>는 생전에 발간된 6권의 '항일혁명편'과 사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의 유고들과 각종 자료들을 기초로 발간한 2권의 '계승본'까지 총 8권으로 이뤄져 있다.
회고록에는 김 주석 입장에서 쓴 항일투쟁사가 기록돼있다.대외 선전용 성격을 띠는 만큼 살던 지역이나 집, 가족과 친구, 함께 조직을 꾸려 활동을 한 동료들의 사진까지 다양한 자료가 실렸다.
<세기와 더불어>는 김 주석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한생을 알려준다'는 책으로 북한에선 성경과 다름없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김 주석의 회고록을 손으로 베끼면서 달달 외우고 그 내용으로 경연까지 치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를 다룬 도서는 주체사상을 강화하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로 내려오는 김씨 일가를 우상화하기 위한 사상 교육에 이용된다.
3대에 걸쳐 권력이 세습된 북한에서 이들을 다룬 도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김 주석의 자료를 모아놓은 '김일성전집'은 100권으로 완간됐고, '김정일전집'은 최근 34권이 출판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김 주석처럼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발간된 김정은 당 총비서를 다룬 도서 '위인과 강국시대'는 지난 10년 집권 동안 김 총비서의 치적으로 내세울 내용을 취사 선택하고 그를 '위인'으로 내세운다. 이러한 도서들은 지도자 신격화를 위해 선택·미화·과장한 내용을 진리처럼 내재화시키다보니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
<세기와 더불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전문 학자들이 김 주석의 항일투쟁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쓰여졌다고 평가하는 반면, 보수진영에서는 과장된 선전물이라고 비판하며 항일투쟁을 폄하한다.
책을 출판한 김승균 대표는 "항일운동은 누가 했던지 값진 일이다"며 "남북간에 공통적으로 서로 칭찬해줄 수 있는 것이 항일운동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 주석의 항일투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얘기다.
변은진 교수는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선인, 2013) 저서에서 "1930년대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은 이 시기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비밀결사에서는 거의 ‘신화적’ 존재였다"고 말한다. 특히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전투’ 소식(동아일보)이 알려진 이후 김일성이란 이름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일제 말기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청년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 <세기와 더불어> 편찬에 참여했던 고(故) 황장엽 전 김일성대학 총장은 한국으로 망명한 후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이 책이 쓰였다는 취지의 증언을 남겼다.
◇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고발·수사…'시대 변화' 반영 주목
<세기와 더불어>는 국내 출간이 뒤늦게 확인된 다음 파장이 일었다. 보수단체가 출판사와 대표를 상고발하면서 서울경찰청 안보수사대가 수사에 착수했고, 지난 27일에는 시민단체 법치와자유민주주의연대(NPK) 등이 낸 김일성 회고록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첫 심문기일이 진행됐다. 교보문고 등 국내 서점은 판매를 중지했다.
그러나 파장의 정도는 과거와 비교하면 수위가 낮아졌다. 상대적으로 덜해 보인다.
지난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 한 출판사 가서원이 <세기와 더불어>를 국내출판하려고 했었을 때는 출판사와 인쇄소 두 곳이 압수수색을 받았고 출판사 대표가 구속됐다.
법원에서도 <세기와 더불어>는 이적표현물로 판단됐다. 대법원은 2011년 앞선 재판부에서 이 책이 "북한에서 대외 선전용으로 발간한 김일성 회고록으로 선군정치를 미화하고 수령론에 입각하여 김일성 부자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며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내용"이라고 본 판결을 정당한 판단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번 약 30년 만에 반복된 출판 사태는 사회가 변해온 만큼 양상이 달라졌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김일성 회고록에 속을 사람이 어디 있나. 높아진 국민의식 믿고 표현의 자유 적극 보장하자”며 <세기와 더불어>의 국내 출간을 지지했다.
여권의 한 중진의원은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보다 '북한' '김일성'이라는 선입견에 따라 출판을 막는 것은 군집권 시대의 유물"이라며 "이제는 그런 책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의식이 성숙돼 있다"며 출판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김성지 기자 ksjok@korearepo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