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개입' 임성근 무죄-이규진 유죄…판단 엇갈려
'직권남용' 판단, 향후 양승태 재판에서도 쟁점될 듯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왼쪽)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왼쪽)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사법농단 연루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직 법관들에게 지난 23일 처음으로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해당 재판부의 유죄 판단 근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 상대방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할 때’ 성립되는 직권남용죄는 사법농단을 관통하는 핵심 혐의지만, 이전까지 진행된 전·현직 법관들의 재판에서는 모두 무죄가 나왔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는 23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앞선 사법농단 재판부는 사법농단에 연루된 판사의 행위가 부당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관의 직권남용 혐의를 무죄로 본 대표적인 경우는 지난해 2월 있었던 임성근 전 판사의 1심이다. 당시 재판부는 임성근 전 판사가 ‘세월호 7시간’ 칼럼을 쓴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기자 사건 등 여러 건의 재판에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무죄판결을 내렸다.

임 전 판사에게 ‘재판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지시를 하는 등 재판 관여를 해도 된다’는 직권이 없으니, 재판에 개입했어도 직권을 남용한 게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었으니,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반면 이민걸·이규진 전 판사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이들 두 사람에게 제한적이긴 하지만 일선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있다고 봤다. 두 사람이 사법행정의 수장인 대법원장 밑에서 사법행정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 사건 재판부는, 대법원장과 행정처가 국민의 재판권을 보장하기 위해 잘못된 재판을 지적할 수 있는 ‘직무 권한’이 있다며 “(판결을) 바로잡기 위해 결정을 취소하고 다시 하라고 권고하는 경우”처럼 명백한 재판개입 행위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통합진보당 소송에 개입해 행정처의 의중이 반영되도록 한 점(이민걸·이규진) △행정처의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법원 내 국제인권법연구회 등을 와해시키려 한 점(이민걸·이규진)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시켜 부당하게 헌재 사건 정보를 수집한 점(이규진) 등이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헌법·법원조직법·법원사무기구규칙·각종 예규를 모두 살펴봐도 법원행정처가 특정 사건의 재판사무 핵심에 관해 담당 판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명문 규정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법과 제도를 종합적·실질적으로 관찰하면 헌법 27조·103조, 법원조직법 9조 1항과 19조 2항, 법원사무기구규칙, 기타 예규 등의 해석상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특정 사건의 재판사무 핵심영역에 대한 '지적 사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일선 법원장이나 법관과 달리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개별 재판의 잘못을 지적할 권한이 있기 때문에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부당한 재판 개입에 관여한 경우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전 상임위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지시를 받아 재판에 개입함으로써 직권남용죄가 적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번 재판부 역시 함께 재판을 받은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와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에 대해선 직권남용죄가 없다고 봤다.

방 판사는 과거 통진당 비례대표 의원 행정소송 재판장으로서 법원행정처의 의중을 담기 위해 배석판사에게 지적한 혐의 등을 받았는데, 재판부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지위를 이용한 건 아니라고 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통진당 행정소송을 특정 재판부에 배당했다는 혐의를 받은 심상철 판사에 대해서도 증인들의 진술이 엇갈린 점을 지적하며 “통진당 소송 배당이 이례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정은 인정되나, 이것만으로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편, 이번 선고 전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1,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경우 증거부족이 이유였다. 그는 소속 연구관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진료팀’이 얽힌 송사에 대해 요약문건을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은 서부지법 집행관 사무소 직원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수사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법원 사무국장 등에게 영장 사본 등을 입수·확인해 보고하도록 부당한 지시를 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역시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영장 공람은 법원장의 통상적인 업무 범위의 일”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이 경우는 ‘직권’은 맞지만, ‘남용’한 게 아니라는 취지다.

이번 판결은 향후 항소심은 물론 1심 판결을 앞둔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도 재판부 판단의 적절성을 놓고 법리 공방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법리인 만큼 '범죄와 형벌은 미리 법률로 규정돼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 부합하는지도 논란거리다.

재판부도 논란을 예상한 듯 "법과 제도는 일순간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에 점진적으로 변화한다"며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원은 변화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법과 제도가 크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법과 제도가 자리 잡는 기간에 문제된 경우가 많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김성지 기자 ksjok@korea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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