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은 일본기업에 책임…위안부는 정부 책임 놓고 '오락가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

일본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배상 책임을 놓고 우리 법원으로부터 '엇갈린' 판단이 나오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 2018년 10월 우리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해당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해 일본 측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상황.

그러나 3년 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2차례 손배소에서 한번은 원고 승소, 한번은 원고 패소를 결정해 한일 양측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우리 법원이 이처럼 같은 사안 혹은 비슷한 사안을 두고 각각 다른 판단을 내린 건 일단 담당 재판부의 '법리적 판단'이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련의 판결이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단 점에서 '법원이 사실상 정치적·외교적 판단을 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징용피해 배상, '한일청구권협정 적용' 놓고 한일 갈등

강제징용 피해배상 판결과 위안부 피해배상 판결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피고가 '일본 기업이냐, 아니면 정부냐'에 있다. 즉, 법리상 일본 기업엔 일제 강제동원 피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봤지만, 일본 정부가 피고가 된 사건에 대해선 담당 재판부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우리 대법원의 2018년 징용피해 배상판결에 대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우리 측의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한일청구권협정엔 양국 정부 및 국민·기업 간의 재산·권리 등 청구권 문제가 이 협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됨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 협정 체결과 함께 당시 우리 정부에 총 5억달러 상당의 유무상 경제협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즉,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조건으로 양국 간 청구권 분쟁의 소지를 없애려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2019.10.30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2019.10.30

일본 법원이 징용피해자 이춘식씨 등이 1997~2003년 진행한 일본제철 및 일본 정부 상대 손배소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주된 이유도 이런 한일청구권협정 때문이다.

그러자 이씨 등은 2005년 우리 법원에도 같은 취지의 소송을 냈고, 이에 대법원은 한 차례 파기환송을 거쳐 2018년 10월 전원합의체를 통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7대 6 의견으로 '일본에 대한 징용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위자료)은 한일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징용피해 소송과 관련해선 당시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재판 진행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5년 이뤄진 한일위안부합의 때문이다. 이와 관련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등의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대법원의 징용피해 배상판결 이후 일본제철을 비롯한 자국 기업의 한국 내 자산압류 등 강제집행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2019년 7월부터 우리나라를 상대로 한 수출규제 강화조치를 발동하는 등의 '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후 일본 기업의 억류 자산 현금화를 놓고 한일 양국이 대치할 때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위안부 피해배상, '국가면제' 적용 놓고 재판부마다 다른 판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내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전을 시작한 건 2013년 8월이다.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 12명은 당시 일본 정부 상대 손배소에 앞서 서울중앙지법에 민사조정을 신청했지만 일본 측은 응하지 않았고 2016년 1월 정식 재판으로 이어졌다. 이어 2016년 12월엔 이용수 할머니 등 다른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두 번째 소송을 제기했다.

위안부 문제의 경우 이 사이 다른 변수도 있었다. 바로 한일 양국이 2015년 12월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담긴 한일위안부합의에 이른 것이다.  

일본 정부는 당초 위안부 문제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해결'된 사안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위안부 문제 등을 놓고 한일관계 경색 국면이 계속되자 미국의 '물밑 중재'를 거쳐 이런 합의가 도출됐다. 우리 정부는 당시 위안부합의를 게기로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엔(약 100억원)을 바탕으로 피해자 지원활동을 위한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뒤 한일위안부합의 과정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고, 이는 결국 화해·치유재단 해체로 이어졌다. 일본 측은 "한국이 위안부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며 맹비난하고 나섰다. 이후 우리 대법원으로부터 징용피해 배상판결까지 나오면서 한일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문 대통령이 올 1월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손배소 첫 판결에 대해 "곤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문 대통령 회견에 앞서 1월8일 배 할머니 등의 소송에 대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왼쪽부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왼쪽부터)

◇위안부합의 파기 논란 등 '한일관계 악화' 영향 미친 듯

그러나 같은 법원 민사합의15부는 이달 21일 이 할머니 등의 소송과 관련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민사15부는 위안부 문제의 불법성과 별개로 '한 국가는 다른 국가의 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국제법상 '국가면제'(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해 이 사건이 아예 소송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3개월 전 민사34부가 위안부 강제연행과 같은 '반(反)인도적 범죄는 국가면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봤던 것과 정반대의 해석이다.

'국가면제' 적용은 앞서 첫 판결 당시 일본 정부가 주장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선 위안부 관련 두 번째 판결 대해 "당연한 결과"란 반응이 나왔다. 반면 앞서 징용피해 배상판결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했던 우리 정부는 "상세 내용을 파악 중"이라며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선 문 대통령의 "곤혹" 발언 뒤 같은 법원으로부터 사실상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판결이 나온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들의 승소를 판결했던 민사34부는 올 2월 법원 정기인사 때 법관이 전원 교체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민사34부는 지난달 29일엔 '판결의 강제집행을 위해 국내 일본 정부 자산을 압류하는 건 국제법 위반'이란 판단을 직권으로 내놨다.

위안부 손배소 첫 판결은 일본 정부가 항소하지 않으면서 '피해자 1인당 1억원씩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이 확정된 상황. 그러나 두 번째 판결에 대해선 원고 측이 항소 의사를 밝혀 최종 결론은 추후 상급심에서 내려질 전망이다.

미 정부는 올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미일 3국 협력'을 앞세워 한일관계 개선을 주문하고 있다.(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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