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일본유학…1970년대 일찌감치 후계자 낙점
반도체 눈떠 한국반도체 손수 인수, 오늘의 삼성 기반 닦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이병철 창업주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이다. 

형으로는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씨(2015년 작고)와 창희씨(1991년 작고), 누나로는 인희(한솔그룹 고문, 2019년 작고), 숙희, 순희, 덕희 씨가 있다.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 씨가 유일한 동생(여동생)이다. 

유년기를 대구에서 보낸 이 회장은 사업확장에 나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947년 상경해 혜화초등학교에 다녔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첫째 형이 도쿄대학 농과대학에, 둘째 형이 와세다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어린 이 회장은 둘째 형과 같이 지냈다.

3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고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 들어갔으며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했고, 럭비에도 뛰어들었다.

당시 스포츠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는 등 아마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는 영광으로 이어졌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부친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고,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이 시절 이 회장은 자동차에 심취했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이 됐다. 이는 이 회장이 취임 직후부터 자동차사업 태스크포스(TF)가 구성하고 전력한 동인이기도 하다. 

1996년 이 회장은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를 만나 맞선을 봤다. 1967년 1월 약혼을 하고 홍 여사가 대학을 졸업한 후인 그해 4월 결혼에 골인한다.

이 회장은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973년 오일쇼크 이후 첨단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랬다.  

그때 한국반도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조악한 집적회로로 전자시계를 만들던 한국 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순전히 자기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리고는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려 애썼다. 페어차일드사에는 지분 30%를 내놓는 대신 기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256메가 D램의 신화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8월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약 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창업주는 1977년 니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화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해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 창업주의 집무실 바로 옆방에서 일을 했다.

이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부회장이 되고도 9년이나 지난 뒤였다. 애초 호암은 이 회장에게 중앙매스컴을 맡길 작정이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부터 이를 권했고 실제로 이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으로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하지만 그해 불거진 이른바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삼성그룹의 후계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사카린 원료 밀수가 적발된 한비 사건은 호암의 장·차남인 맹희·창희 씨가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사건 직후에는 차남인 창희 씨만 구속됐다. 이후 호암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했다. 

서른여섯이던 맹희 씨는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10여 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삼성의 경영권이 장남인 맹희 씨로 넘어갈 듯 보였다.

하지만 부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그는 이병철 회장에게 경영권을 돌려주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부친에 대한 반발심으로 반기를 들었고 후계 구도에서도 지워졌다. 부친이 제 3자 명의로 신탁한 차명재산을 두고 이건희 회장과 유산 소송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이건희 회장은 홍라희 리움 미술관장 사이에 이재용 현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기획 경영전략부문장, 이윤형(사망)씨를 두었다.

임인영 기자 liym2@korea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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